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소설. 드래곤라자에는 내 인생관에 참 영향을 많이 미쳤던 많은 대사들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오늘 내가 경험하였던일은 바로 드래곤라자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자, 나의 닉네임이기도 했던 핸드레이크가 했던 '나는 단수가 아니다.' 라는 말이다. 단수가 아니라는말은 이 단어는 복수라는 뜻이다. 모토는, 대략 이렇다. 세상에 '나' 라는 존재하는 바로 하나지만, 만약에 존재를 아무도 알수 없고 기억조차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즉,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나 기억속에 있는 '나'를 모아야 진정으로 그것이 '나' 라는것이 된다는 것이다.

 

 

  판타지 소설안에서의 이 개념은, 인간이 다른 종족에 비해 우월한지. 왜 곧 인간의 세상이 오는지를 표현해주는것이 된다.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인 에반게리온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념들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항상 타인이 바라봐주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에 대한 고민을 하다보면, 어째 나도모르게 나 자신의 생각속에 빠져서 다른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하는경우가 많았었다.

 

 

  오늘은, 내가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첫 교육을 나간 날이다. 바로 봉사활동. 그 봉사활동하는 모임은 이러한 것들을 '나눔' 이라고 불렀다. 오늘은 '도배나눔' 바로 독거노인의 집에 찾아가 집을 정리해 드리고, 도배나 장판등을 해드리는 것이다. 이것 말고도 연탄을 옮긴다던지 하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사실 자의로 인해서 간 봉사활동도 아니고, 도착해서도, 가기전에도 '내가 왜 이것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자괴감에 사로잡혀있던것이 사실이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약간 군생활의 추억도 생각나고, 작업을 지시하고 작업을 받고 나는 마치 이등병처럼 모든 작업에 대해서 보고 처음 해보고 배우는것이 주된것이 되었다. 대략 15명정도 되는 사람들, 한번도 나와 만난적도 말을 나눠본적도 없는 사람들과 오늘 또 한사람의 '나'를 만들기위해 '나'를 나눴다.

 

 

  비록 서툴고 미숙했지만, 나름의 일원이 되어 일을 끝내고나니,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지고,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신나서 넘치게 되었다. 그동안 주말에는 주중에 힘들었고 노곤한 몸을 달래려 집안에서 게으름 피우며 빈둥거리기 일쑤였던 나, 그래서 목적없이. 그렇다고 뚜렷한 목표없이 그냥 시키는 일만하는 그런. 피동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던 나에게 나름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사회인이 되었다. 나를 감싸줄 있는 그 어떤 모든 수식어도 이제는 나에게 붙지 않는다. 어린이. 청소년. 학생. 대학생. 군인. 그러한 모든 신분을 넘어서 이제 사회레 첫발을 내딛는 나에게, 이러한 경험은 앞으로도 앞으로 나아가는게 뭔지. 진정으로 나를 생각하는것이 어떤것인이지를 느끼게 해주는 그러한 것이 될것이다.

 

 

  비록 끝날때 까지 누구 한사람의 정확한 이름도. 누구 한사람의 정확한 얼굴하나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바쁜하루였지만, 바쁜하루속에 나에게 얻어진 모든것들에 나는 감사한다. 죽은 열정이 살아나는 느낌이 생긴다. 부디 이런 기분. 이러한 생각.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진정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http://twitter.com/thehandlake

 

트위터. 원래는 새의 지저귐이라는 뜻이라고 합디다.

아이폰을 사게 되어서, 음 마이크로블로깅을 하려고 했는데

미투데이를 할까.. 하다가 하게 되었네요.

 

혹시라도 하시는 분들은 추가해주세요~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의 모습.



  연치 않게 보게 된 영화다. 사실 나는 이렇게 욕설이 전면적으로 배치된 영화라던가, 조폭 영화. 그 안에서의 애환이라던가 사나이들의 진한 우정. 이런것들이 풍겨지는. 흔히들 말하는 '마초'의 포스터의 영화는 그렇게 흥미가 생기지 않는 편이다. 언제였던가? 한창 '친구' 라는 영화가 브라운관에서 연일 상영되고 있을 때 그랬듯. 어쩌면 나는 이 영화를 그렇게 예단하고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도 나름 사실이다.


  사실 똥파리라는 이 영화는 약간의 때도 좋았다. 워낭소리라는 국내의 독립영화중에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가 나온 바로 뒤의 영화. 어쩌면 주목받기에도 참 적절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든, 독립영화든 나에게 그렇게 크게 다가온 영화는 아니었기에, 그 때 당시의 열풍에 나는 잠시. 숨죽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날의 주말. 나는 이 영화를 보려고 결심한다. 원래는 스타일. 내가 보고싶은 영화가 아니라면 그렇게 찾아보는 편이 아니었던 나는, 무심결한 심심함에 부끄럽게도 영화를 재생하기에 이른다.


  역시나 초반부터 약간의 예상대로 흘러간다. 대로변에서 한 여자를 구타하는 남자의 모습. 그리고 뒤로 걸아가서 차분하게 밟아 주시는 우리의 주인공 상훈. 나는 처음에 이 여자가 주인공의 사랑하는 그녀라도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왠걸. 상훈은 그 여자까지도 자신의 폭력의 희생자로 만든다. 그리고 꼬나무는 담배 한가치. 그 폭력의 이유도. 정당성도. 아무런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행하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 후에 상훈의 소속에 대해서 나오게 된다. 흔히들 말하는 용역업체. 어느 시위장이라고 수 있는 곳에서 사람을 패면서 그 돈을 받는다. 또 폭력.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행하는 폭력에 대해 이야기 한다. '씨발' '씨버럴' 하는 맛깔스럽게 욕을 하는 상훈도. 그 주위의 환경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체 영화는 흘러간다.


  그러다가 첫번째 상훈의 다른 모습이 나온다. 바로 한꼬마를 두고 그 아이에게 윽박지르지만, 그래도 애정이 묻어있는 듯한 그의 행동. 사람과 '돈'이나 '폭력'이 아니면 관계 지어지지 않던 그에게 약간 다른 모습이다. 장면은 관객에게. '아 그래도 그렇게 나쁜놈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품게 하는 처음의 장면이다. 보통의 무자비한 사람이 아닌. 다른모습이 그려진다. 그후에 또 한장면. 바로 여주인공 연희를 만나는 장면이다.

 
  나도 그렇고 관객도 그렇고, 아 저 여려보이는 여자애가 어떻게 될지 두려워진다. 영화의 시놉시스조차 보지 못한 나에게도 그러했다. 그런데 나와 우리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어간다. 오히려 잘못을 따지고 욕을 서슴치 않는 이 여자애.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중요한 장면은, 그 다음에도 이어진다.


  바로 아버지가 출소했다는 이야기. 근데 상훈의 반응이 심상치않다. 아.. 아무래도 이 녀석은 구제불능인가. 들어가자마자 아버지를 손등에 피가묻을 정도로 패버리고, 아침에 그냥 일어난다. 이 상훈이라는 녀석. 도대체 때리는거 말고 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 생각한다. 아. 하나 더있지. 욕 아주 잘하는거.


그러다가 정말. 이 영화의 주제가 나온다. 영화는 액자구성으로 상훈의 과거를 보여준다. 그역시도 폭력. 하지만 그 폭력의 주체가 달랐다. 그것은 바로 가정폭력이었다. 사람은 누군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할 그만한 이유와 나름의 숨겨진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없는 폭력에는 보통 악질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 악질중에서도 악질. 그 가정폭력이 바로 화면 전반에 나타나게 된다. 그 안에서 무기력한 남자아이는 누구나 예상하듯 바로 상훈일 것이다.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무기력함. 그 사이에서 자신의 누나가 찔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범인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 아무리 들쳐엎고 뛰어봐도. 병원에 가서도 결과는 단 한가지. 이미 죽었다는 의사의 차디찬 한마디와. 그리고 교통사고를 통해 돌아가실것을 암시하는 상훈의 어머니. 그리고 그것을 멀뚱히 보고 있는. 이 똥파리의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것. 바로 그 아픈 핏줄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나오는 연희의 가정. 이 곳도 평온하진 않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첫 등장부터 아주 스펙타클하시다. 이 집안은 또 왜이래? 하는 순간. 어. 아버지는 나름 무기력해보이고 그렇게 사람 때려먹을 거 같진 않게 생긴 인상. 아. 이집안은 뭐가 문제야? 허이구. 여긴 문제가 더 심각할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연희의 아버지는 정신병이 있으신듯 보였다. 뭐. 누가봐도 행복해보이는 가정은 아니니. 어찌되었든 참 연희도 불쌍하다. 예쁘게 생겼던데.



  영화는 이제 주인공들의 생활에 대해서 보여준다. 평범(?)하게 돈을 수금하러 다니는 상훈의 모습이 잡힌다. 아 어째 이 주인공은 정말 때리는거랑 욕하는거 말곤 할 아는게 없다. 아 또 영화에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는데, 옆에 나오는 그 고삐리. 어째 이청용을 닮았다. (.....) 다음집을 넘어가서도 상훈의 수금은 계속된다. 근데 묘하게도 이집은 아버지가 이미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내게 가상 인상깊었던 대사가 나온다.

누굴 때리는 씹쌔기 있잖아.

그 새끼는 지가 안맞을 줄 알거든?

근데 그 씹쌔끼도 언젠가 좆나게 맞는날이 있어요.

근데 그날이 좆같이도 오늘이고 때리는 새끼가 좆같은 새끼네

.....

아 이나라 씨발 애비들 아주 좆같아.

이게 븅신들 같은데 지 가족들한테는 아주 김일성같이 굴라 그래 이 씨발놈들이.

 
  웃음지어지지 않는가? 여기서 상훈의 가정폭력. 특히 아버지들에 대한 증오가 있음을 알려준다. 눈빛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입에는 욕을 달고 살고.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가 대다수가 폭력으로 이뤄지지만, 그래도 가장 싫어하는게 있다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 이 나라의 아버지. 가정폭력이다.


  친구의 노력에. 아버지를 찾아가고, 아버지는 사과하지만, 상훈의 증오는 그렇게 풀려지지 않는다. 다시 아버지에 대한 폭력. 폭력 폭력....


  그리고 다른 주인공의 가정에 대해 보여준다. 이곳에도 어머니의 존재는 없어진다. 자신의 어머니가 맞는지. 죽어가는것인지 모를. 그 상황을 보는 연희. 참 아이러니 하게도. 그 폭력의 당사자는 바로 상훈의 패거리이다. 폭력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불특정다수와 관계되는 특성이 있다. 나중에 자신이 행했던 폭력들이 다시 자신을 덮치리라는 생각을 상훈은 항상 하고 있을까?


  여기서 영화는 연희의 동생인 영재에 대해 얘기한다. 뭐 아주 모범적인 비행청소년이라 할 있겠다. 알고보니 이청용을 닮은 녀석의 친구. 이녀석이 폭력의 패거리에 가담하게 된다. 눈빛이 강하고. 매우 불안정해보이는 녀석. 후에 뭔가 무슨일을 벌일꺼같은. 그리고 이상하게도 상훈-연희와 모두 관련지어지게 되는 이 청년은, 후에 아주 큰일(?)을 하게 된다.


  연희와 상훈은 반복되어지는 시궁창같은 일상에서 나름의 도피구로 상대방을 택한다. 둘은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직감하는 모양이다. 파리는. 파리를 알아보는 것일까. 그렇게 그 둘은 가까워 진다. 약간 번외적인 얘기를 하면, 둘이 만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장면에 배경음이 흥미롭다. 마치 파리가 주위에서 앵앵 움직이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이부분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착각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폭력에 가담하게 된 영재는. 그 답지않게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도 가족앞에서만 김일성이었나? 아니라면 그에데 일말의 양심이라는것이 남아있었나. 모를일이다. 상훈은 날이갈수록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게 '가족' 이라는 사상만 주입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리저리 잘 지내고 있던 상훈도, 그에게 가족. 가정. 그러한 단어가 들어가게 되면 그는 폭주한다. 대상을 잡지 않는 폭력. 무차별한. 무자비한. 그만큼 어렸을 때의 상처는 그가 그만큼 커서도 크나큰 영향을 받는다.


  상훈은 분노를 계속 풀지만, 그 풀리지 않는 분을 못이기고 또 아버지집의 방문을 연다. 근데 그곳에 잠깐동안 스치는 어머니와 죽은 동생. 그리고 차게 식어보이는 아버지. 그는 또 들쳐엎고 뛴다. 몇십년전의 그날 처럼. 또 뛴다. 살아라. 죽지말라고, 상훈의 진심이 나온다. 확실히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연희와 상훈의 연민은 극에 이른다. 서로가 서로의 최악의 날이된 그 어떤 날에. 둘은 강변에서 운다. 서럽게. 둘만 운다. 세상은 역시 엿같을지 모르겠다.



  그 후 상훈은 변했다. 아버지의 자살을 경험했고, 또한 자신이 유일하게 아끼던 조카가 할아버지를 왜 때리냐며 울때. 그는 변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사이에 폭력으로 관계를 가지는 버릇을 청산하려 한다. 그런 약한 마음과 자신을 정리하려는 그에게 우물쭈물함이 생긴다. 그 우물쭈물함을 처음 꾸짖음 받았던. 눈빛이 무서운 존재. 영재가 드디어 큰일을 해버린다. 일은 묘하게도. 마지막일을 한다고 했던 그날. 사랑하는 조카의 재롱잔치. 유일하게 자신의 아픔을 공유하던 연희까지 모두 모이게. 그리고 자신의 배다른 누나를 위해서. 자신유일의 친구를 소개시켜주던 그자리. 그 때. 상훈은 차디차게 식어간다. 장도리에 맞아서, 서서히 식어가는 그는 계속 말한다.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가야한다고. 그리고 상훈의 잠시나마 행복했던 때를 보여준다.



  그 후에 상훈만이 없는 재롱잔치가 펼쳐진다. 그리고 상훈만을 남겨둔 나머지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 후에 모두의 슬픔이 그려진다. 누구도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모습을 쉽게 보이지않았던 똥파리. 똥이 있는 곳에서만 자신을 뒹굴리며 손바닥을 비비며 처절하게 살아왔던 그. 하지만 그 똥파리가 그 나머지 사람들을 이어주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딸을 죽이고 아내를 죽음으로 내몬 아버지. 배다른 누나. 자신의 친구. 조카 형인이. 그리고 연희.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또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포장마차를 때려부시던 영재. 그걸 바라보는 연희. 영화는 그 속에서 상훈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다른 비극의 시작일까. 그 선택을 관객에게 맡기고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는 얼마나 가정안에서의 폭력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며, 또한 그 폭력이 또다른 폭력을 재생산하고, 그것이 얼마나 비극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엿같은 세상과, 더러운 핏줄을 한곳에 보여주는 영화. 아무것도 아닌듯. 흘러가는 똥파리지만, 그가 보여주는 삶은 누군가의 마음을 따듯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설사 그가 없어진다해도 말이다. 똥파리는. 그렇게 더러운 존재는 아니었는 모양이다.

태그 : 똥파리

G - Dragon





  요즘 가요계는 때아닌 표절논란으로 뜨겁다. 사실 이 묵은 떡밥아닌 떡밥은. 한국 가요계에 있어서는 끊이지 않는 병폐이자 나쁘게 이어오던 폐습과도 같은 것이다. 그 방아쇠를 당긴 주인공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룹 빅뱅의 리더. 평소 작곡과 프로듀싱에도 두각을 들어내며 YG사단의 최선두주자. 그의 인기는 이미 말로 하지 않아도 다들 아리라 생각한다.

 
  사실 지드래곤의 표절을 논하기전에 일단은 그가 만들었던 곡들에 대한 분석이 먼저여야 하겠다. 그가 작업했던 빅뱅곡들 중에도 표절의 의심곡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추후협의라는 이상한 형태로 계약이 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그냥 사장되어버린 표절논란들이 있다. 이상하게도 항상 지드래곤의 작곡이나 프로듀싱형태에는 꼭 '공동작곡가' 가 등장한다. 둘이 어느정도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한 곡을 만드는데의 비율을 어떻게 되느냐는 일반대중들은 물론 아마 그의 팬들도 모를꺼라 생각한다. 사실 힙합신에서의 공동작업이나 작곡은 흔히들 있는 일임과 동시에 그렇게 문제삼을 만한 문제도 되지 않는게 사실이다. 근대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논란이 되었다. 왜일까?


  마치 그는 혼자 많은 것을 도맡아 하는 듯한. '천재'적인 인상이 대중에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YG엔터테이먼트의 고도의 마케팅전략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다. 실력파 아이돌.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아이러닉한 말이다. 어느사이에 아이돌이라는 건. 기획사의 입맛과 대중의 입맛에 적당히 구미를 맞춘 그냥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게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아이돌가수들의 가창력은 가히 형편없다. 그러한 가운데 실력이 있고. 그리고 작사작곡도 하는 아이돌의 등장. 그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도 충분했다.


  YG는 이러한 마케팅의 이점을 이미 잘 알고있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 이라는 걸출한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댄스를 넘어 서태지라는 어찌보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스타와 함께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또한 뮤지션이라는 인정도. 당대 최고의 문화대통령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그것의 위력. 당연히 잘 알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묘하게도, 지드래곤에 대한 그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가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의 솔로 1집이 나오기 전까지는


  물론 과거의 빅뱅의 곡들이 약간의 표절시비가 붙긴했지만, 빅뱅의 인기에 누가미칠 정도는 아니었고 그 중심에 패션과 그리고 천재작곡가라는 인식이 더해지면서 지드래곤은 점차 비상하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서태지 이후에 항상 많은 댄스그룹과 아이돌들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노력은 항시 존재해왔다. 하지만 누구도 댄스그룹이라는 타이틀과 동시에 뮤지션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지는 못하였다. 그 향수를 묘하게 파고들었던것이 바로 지드래곤. 그리고 YG엔터테이먼트이다.


  젊은 나이에 자서전이라는 무리수까지 던져가면서. 그리고 많은 논란. (19금 의상, 욱일승천기의상 등) 의 논란 등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기획사의 짧은 코멘트. 그리고 그후에 그들에 대한 인기와 영향력으로 그것을 덮어버렸던 병폐. 그것이 결국 이번 사건에 귀결되는 결과가 된다.


  처음에 그가 자신의 미니사이트를 통해서 신곡을 공개한다. 2ne1때에도 재미를 봤었던 30초 선공개 방법. 그리고 그것을 공식홈페이지가 아닌 자신의 미니사이트에서 공개 함으로써 자신의 자작곡임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물론 곡이 흠잡을 곳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것은 논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선공개 하였던 버터플라이와 하트브레이커는 나란히 표절시비가 걸렸다. 워낙 유명한 곡들과의 표절시비라 곡들을 따로 서술하지는 않겠다. 내가 듣기에는 그것은 명백하기에 '표절'에 가깝다. 버터플라이와 같은 경우에는 랩부분을 제외한 보컬부분에서의 유사점은 그것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듣더라도 누구나 비슷한 곡이라고 생각될만큼의 곡이다. 물론 법적으로 표절에 걸리지 않을 만큼 잘 만들었을리라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얼마전에 소니에서의 입장표명이 바로 그것의 답이다.

 
  어느사이엔가 한국가요계는 그특색은 줄어들고 외국의 트랜드만을 따라가는 따라쟁이시장이 되고 말았다. 물론 외국의 음악을 자신의 특색과 결합시켜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과정은 훌륭하다. 하지만 자신의 특색과 결합시키는 것 없이 무조건 인기몰이와 단순한 화제를 위하여 외국의 곡들을 참고하는 경우가 점차 많아졌다. 이효리의 겟챠라던가. 아니면 이승철의 소리쳐. 아니라면 최근의 왁스의 결국너야 라던가 다비치의 8282같은 곡들은 절대로 그 전의 곡들이 없었다면 나올 수가 없던 곡들이다.


  문제는 이것이 꼭 표절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것을 만든 창작자의 양심의 문제이다. 어느정도선에서 참고하였다고 밝힌 창작자나 어떤 뮤지션의 어떤곡에 영향을 받았다는 창작자는 없었다. 모두들 후에 논란이 된 후에야 샘플링계약을 가지던가 그마져도 없으면 그대로 끝나버리는게 사실이다.  이러한 병폐가 잘 들어난 것도 이번 지드래곤 1집에 그대로 묻어난다. 하지만 논란이 일자 지드래곤측에서는 완곡이 나온 후에 말하자. 처음의 순수창작의 분위기에서 결국엔 공동작곡으로. 결국에는 유행하는 비트를 썻을 뿐이라며 계속 상황을 피해가기만 했다.


  결과적으로 소니의 입장발표가 나온후에는 '이곡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라고 일관하며 상황을 모면한다. 결과적으로 표절시비가 그의 음원차트점령에 도움을 준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나오는날 들어보았지만, 요즘 트랜드식이 되어가고있는 일명 '오토튠'으로 음악내내 자신의 음색을 뒤바꾼 그의 음악이 그렇게 귀에 걸리지 않았다. 기타 다른 곡들도 여타 나왔던 음악들과의 차이점은 그렇게 느끼지는 못하였다. 그냥 최신 트랜드를 쫓아가기만하는 음악은 매력이 없을 뿐이다.


  본질은 이렇다. 어떠한 뮤지션이 다른 뮤지션의 곡과 비슷한 음악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설마 의도적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논란에 적극적으로 맞서고 해명해야 옳다. 하지만 조금씩의 보도자료만을 시간차로 뿌리다가. 결국에는 '이곡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라는 결론. 그 후에 위력을 바탕으로 한 공중파에서의 순위점령. 어느덧 소니측의 표절에 대한 입장표명과 또한 그의 대한 표절시비는 또다른 사건에 가려진채 여전히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우리나라 가요계는 이미 대중들의 선택이라고 하기에는 그 명맥을 다하였다. 소수 팬클럽이 음원을 독식하며 그 음원차트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기성세대나 아니면 30대까지 내려와서도 음원사이트에서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음반은 점차 예전의 LP와 테이프가 사라지듯 그러한 아날로그적인 물질에 불과해진지 오래이며, 문화생활에서의 음악이란 그저 공짜라는 인식과 싸구려 mp3와 핸드폰 밸소리에 족한 음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 음원 1위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라며 자신 하는 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한 일이다.


  어쩌면 그는 용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린나이에 기획사에서 자유롭게 음악을 해왔다고 한 그였지만, 그 역시 그런 기획사의 색이외의 곡을 만들지는 못하였고, 천재라며 하물며 어디서는 모짜르트와의 비교를 하는 그였지만. 결국에는 최신 트랜드에 자신이 색을 덧입히지 못한 그러한 불완전체로 남았다.


  대중의 관심이 떠나간 가요계. 음악. 그 가운데에서 외롭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뮤지션이 있는가 하면, 그 가운데에서 대중의 약간의 시선을 받기를 바라면서 트랜드를 따라간다는 명목아래 이러저러한 외국곡들의 소스를 차용하여, 다시 재생산하여, 그 악순환을 반복하는 가요계. 과연 가요계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되묻고 싶다. 인기가 많다고, 음원차트에서 1등한다고, 수많은 평론가와 네티즌들의 귀를 무시한체 나아가는 그는 이제 용이 아니다. 용이 되고싶어하다 실패한. 이무기일 뿐이다.

세상에는 떠나지 말라 떠나지 말라 붙잡아도 꼭 가야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헤어진 연인? 잊혀진 친구들? 글쎄. 그것들도 그중의 일부겠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빈자리를 확연하게 느낄 있는 때는. 바로 그 사람이

죽었다. 이제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할때가 아닐까 싶다.

 

 

어디엔가는 살아있겠지 하는 막연하지만 막상 찾기에는 그 귀찮음에 끝나는 그러저러한 인연들.

하지만 막상 그 사람이 죽었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했을 때의 그 기분은 남다르다.

 

 

사실 그랬다. 어쩌면 잊혀진 친구보다도. 헤어졌던 연인보다도. 더 가까웠을지 모르는 사람.

알게 모르게 가슴 깊숙하게 들어와 그 자리를 티내지 않던 사람. 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가는 것에 대한 슬픔은. 어떻게 이제 글로도 표현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어찌보면 나는 그들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남들 욕할 때 함구했고 남들이 칭찬할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는 고속도로 옆 코스모스에 비유하면 맞을까?

 

 

하지만 지난 5월. 나는 그러한 나의 무관심이 어떻게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는지를 배웠다.

그 무관심이 그를 낭떠러지에서 그를 밀어버린 힘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8월. 또 다른 한분이 가셨다. 나름 연로하신 연세에 나름 편히 가셨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몸의 반을 잃었다며 슬퍼하시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라 그런가.

왠지 떠나보내지 말아야 할. 그런 사람인듯하야 마음이 더더욱 착찹하다.

 

 

5월달처럼 죄인이 되어 서럽게 눈물을 흘리진 않지만,

그냥 이 세상의 공기가 다 약간의 압력을 더하는 듯한 상실감. 그것이 차이라면 차이겠지만.

 

 

나는 참. 두 분을 보내드리기 힘들다. 힘이 든다.